Aug 16, 2009

싯달타

그의 눈에는 이미 친구 싯달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얼굴들이 보였다. 수많은 얼굴의 긴 행렬, 강물처럼 흐르는 수백 수천의 얼굴들이 한결같이 나타났는가 하면 사라졌고, 그러면서도 역시 모두가 동시에 그곳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얼굴들은 모두가 끊임없이 변하여 새로운 얼굴이 되었고, 그 얼굴들은 역시 모두 싯달타의 얼굴이었다. 그는 물고기의 얼굴을 보았다. 무한히 고통스럽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한 마리의 잉어, 찢어진 눈을 하고 있는 죽어가는 물고기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주름투성이로 잔뜩 찌푸리고 우는 새빨간 갓난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한 살인자의 얼굴을, 그 살인자가 단도로 사람을 찌르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그와 동시에 이 살인자가 결박당하여 꿇어앉은 채 형리의 내리치는 칼에 목이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그는 광적인 사랑의 교전 자세를 하고 있는 벌거숭이 남녀의 몸뚱어리를 보았다. 그는 말없이 싸늘하게, 허무한 모습으로 사지를 뻗고 있는 시체를 보았다. 그는 동물들의 머리를 보았다. 산돼지의 머리, 악어의 머리, 코끼리의 머리, 황소의 머리, 새들의 머리들. 그는 신들을 보았다.

출처: p.190. 헤르만헤세, 싯달타, 소담출판사.

 
siddhartha. 소문자로 시작되는 모든 것. 그는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났고 행려자로 청년을 보냈으며 나무 한 그루의 모습으로 죽었다. 그는 모든 것을 맛보았으며 그것이 세상의 진리임을 알았다. 그는 온갖 소문자들의 생을 알았던 것같다. 헤르만 헤세는 이것을 말한다. 인간 싯달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삶의 총체성에 대해서. 존재함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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