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 22, 2009

시계태엽오렌지 - 엔소니 버지스

"자, 이제 어떻게 할까,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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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 www.myspace.com




하루에도 몇 건씩 강력범죄가 일어나는 세상에서 살고있는 우리야 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일방적인 관계 속에서 행해지는 것이라고 알고있겠지만, 그것도 우리에게 직접 관련된 것이 아닌 이상 우리는 매우 객관적이고 따라서 차가운 눈으로 이 명제를 보게 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알렉스가 피는 우리의 익숙한 친구라하며 그의 무리들을 데리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은 매우 현실적이지가 않게 그려져 있다. 왜냐, 이들은 그저 어떤 불량배들이기 때문이다. 
알렉스의 부모가 '밤거리에는 십대 폭력배들이나 뭐그런 것들' 때문에 무섭다고 하는 것들도 - 매우 역설적인 장면이다- 이미 폭력 자체에 대한 사회적 정의를 내려버리고 그것으로 폭력이란 추상적인 '어떤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아들이 하고 있는 불량배짓을 모를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알렉스는 매우 순수한 광기와 천진난만한 폭력성으로 길들여저 있는 일명 '악마'이다. 
그의 앞에서는 음악조차 순수선이 아닌 순수악이 되어 버린다. 이런 앞에서 사회적 통념은 이 순수하게 잔인한 악마를 잡을 수가 없다. 
그러나 루도비코 요법이라는 것은 오렌지에 시계태엽을 달아 폭력의 자유의지를 짜내어 버리는 것이었고, 알렉스는 자신이 행한 것들이 오히려 실제보다 더 실제같은 폭력적인 영화를 보여 주자 구토반응을 일으키는데. 이 영화라는 것은 폭력에 대한 사회의 가차없는 통념을 여실히 반영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나싶다. 왜냐하면 소파에 누운 채 그날의 사건사고를 tv로 보는 사람들이란 거리를 활보하는 실제적인 폭력배들을 마주칠 일이 전혀 없고, 따라서 이 사람들은 폭력에 대한 추상적인 생각만으로 실제보다 더 실제적인 폭력을 상상해버리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러니 순수한 깡패놈인 알렉스에게 이 가공된 폭력은 쥐약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자유의지가 완전히 빠져버린 상태의 알렉스는 착한 놈이 아니라 얼빠진 이상한 놈이 되어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를 정부타도의 한 묘책으로 이용한 지식인들로 인해 마침내 시계태엽을 빼내게 된 알렉스는 그 빠져나간 빈 자리에 무엇인가를 채워넣어야 겠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그가 무의식적으로 깨닫게 되는 '철이 든다'라는 생각이다. 
자유의지는 신이 인간에게 준 불안정한 것으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선과 악이 갈라진다. 그러나 사회에서 내리는 선과 악에 대한 정의는 한정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유의지를 역으로 옭아매게 되어 인간 자체를 경시하게 되고 이것은 인간의 존재론에 던지는 뾰족한 돌멩이이다. 따라서 자유의지가 사회적 선/악 정의에서 떨어져서 자발성을 가지는데에는 조금의 철이 들 시간이 필요하며, 이것만큼은 그누구라도 건드릴 수 없다는 철학이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 "원하는 대로 하시오. 다만 당신이 상처받지 않도록."

붙임 : 이 소설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의 원작이지만 소설 자체는 소설로서 훌륭하고, 영화 또한 영화로서 훌륭하기 때문에 둘 다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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